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리 워틀리 몬태규 (문단 편집) == 생애 == 메리는 노팅엄셔 주의 저택에서 초대 [[킹스턴어폰헐]] [[공작(작위)|공작]]인 이블린 피에르폰트(Evelyn Pierrepont)의 장녀로 태어났다. 명문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보수적인 부친 아래에서 메리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구열이 높았던 메리는 방대한 자료가 있는 저택의 서재와 도서관을 전전하며 독학하였다. 다양한 문학 작품을 섭렵한 메리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을 공부하고 글을 쓰곤 했다. 메리는 여러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 앤 워틀리(Anne Wortley)라는 친구가 있었다. 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메리는 앤의 오빠인 에드워드 워틀리 몬태규(Edward Wortley Montagu)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에드워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법률가로 [[휘그당]]을 지지하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쌓은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메리를 부유한 귀족과 결혼시키려 했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1712년, 23살의 메리는 11살 연상의 에드워드와 시골로 도망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에드워드가 하원의원이 되면서 부부는 런던에서 살게 되었다. 결혼한 지 1년이 되는 1713년에 메리는 첫 아이인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다. 메리는 가정에 충실한 동시에 귀족으로써 사교계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사교계 인사들은 메리의 아름다움과 말솜씨에 반했고, 메리는 런던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715년 겨울에 메리는 [[천연두]]를 앓게 되었다. 병을 이겨냈지만 메리는 칭송받던 미모를 다소 잃게 되었다. 1716년, 에드워드는 터키 대사로 임명되었다. 메리는 남편을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게 되었다. 메리의 여행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이를 전부 기록했다. 그리고 특유의 사회성으로 터키 유력가의 부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 중에는 술탄의 후궁도 있었다. 1718년에 본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메리는 유럽이 얼마나 [[하렘]]에 대해 남성중심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비웃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으로 돌아오기 전인 1718년 1월에 메리와 에드워드는 딸 메리를 낳았다.--애 이름 짓기가 얼마나 귀찮았던 거야-- 두 자식을 두었으며 사랑의 도피로 맺어졌던 두 사람이었지만 중년에 접어든 부부는 냉랭한 사이가 되었다. 1736년, 메리는 프란체스코 알가로티(Francesco Algarotti)라는 이탈리아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23살이나 연하였지만 학식이 깊고 매력적인 그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진 메리는 함께 유럽 대륙으로 도망가기로 결정했다. 1739년, 50세의 나이에 메리는 건강상의 요양을 핑계로 대륙으로 떠났다. 메리는 프란체스코와 동거했지만 2년이 채 안 되어 그와 헤어졌다.[* 그러나 나쁘게 헤어졌던 것은 아닌지 노년에 두 사람은 담백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을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베니스, 피렌체, 로마, 제노바 등을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던 메리는 1761년에 딸의 편지로 남편의 죽음을 전해받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인 1762년에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